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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문화원 춘계 문화유적 답사[경기도 고양시 일원]

하남문화원윤재민 │ 2017-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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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답사일 : 2017년 4월 20일 목요일 

답사 장소 : 경기도 고양시 일원 - 행주산성, 최영장군묘, 벽제관제, 가와지볍씨박물관, 서오능

 

 

 행주산성

사적 제56호.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148-3 (지번)

지정면적 361,171㎡, 둘레 약 1,000m. 강안(江岸)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정확한 축성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나, 강안의 험한 절벽을 이용하고 동·북·서로 전개된 넓은 평야를 감싸안고 있는 것은 삼 국시대 초기의 산성형식과 부합된다.

이곳이 백제의 초기 영역에 속하여 서해안 으로의 수운(水運)과 관계된 중요한 거점으 로 추측되며, 특히 나당전쟁(羅唐戰爭) 때 까지 남북교통의 요충에 해당 하여 고구려 와 신라의 공방전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 다.

행주산성 특히, 이 산성은 1593년(선조 26) 권율(權慄)의 전적지로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으로 유명하다. 당시 의병과 승명을 포함한 2천3백명으로 왜군 3만 여명을 크게 물리친 전과를 이루어냈던 곳이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순찰사로 있던 권율 장군은 이 터에서 3만 왜군을 막아내고 그 여세를 몰아 수원 독산성에 포진하여 서울을 탈환하고자 경기, 충청, 전라 3도의 총 지휘관이 되어 선조 26년(1593) 2월 11일 승장 처영이 이끄는 승군을 포함한 장병 만 여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진주하였다. 이 싸움에서는 우리나라의 전쟁 역사상 처음으로 '재주머니 던지기'라는 전법이 쓰였다. 아낙네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덧치마를 만들어 입고는 치마폭에 돌을 주워 담아 싸움을 거들었는데,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바로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최영장군 묘

경기도 기념물 제23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70-2.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문화유씨와의 합장 묘이며, 화강암 장대석으로 2단의 호석을 두른 전형적인 고려 양식의 방형묘(方形 墓)이다.

곡장(曲墻)이 둘러쳐진 봉분의 바로 앞에 는 혼유석ㆍ상석ㆍ향로석이 밀착된 채 차 례로 놓여 있으며, 그 좌우에는 2기의 묘 비가, 봉분의 좌측 뒷편에 1기의 묘비가 최영장군 묘 각각 세워져 있다. 봉분 좌우의 묘비 앞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 1쌍이 배열되어 있으며, 이 묘의 뒤편 한 계단 위에 장군의 부친 최원직의 묘가 있다. 

 

벽제관지

사적 제144호. 지정면적 4,150㎡. 한양으로 오가는 길목에 세워서 중국의 사절(使節)들을 머물게 하였던 곳이다.

한양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관서로(關西路, 義州路 또는 燕行路)에는 이와 같은 역관 이 10여 군데 있었는데, 한양에 들어오기 하루 앞서 반드시 이곳 벽제관에서 숙박 을 하고 다음날에 예의를 갖추어 입성하 는 것이 정례(定例)였다.

조선 초기에는 제릉(齊陵:태조비 神懿王 后의 陵)에 국왕이 친히 제사지내러 가는 벽제관지 길에 국왕이 숙소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지금의 벽제관터는 1625년(인조 3)에 고양군의 청사를 옮기면서 아울러 지은 객관(客館)의 터이다.

 

 

고양 가와지 볍씨 박물관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471-10

   

선사시대부터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의 주식이 되어온 쌀, 그런데 실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고양시 농업기술센터 내에 위치한 고양 가와지볍씨 박물관은 1991년 일산 신도시 조성과정에서 고양시 대 화동 성서마을 옛 가와지마을 터에서 발견된 5천년전 한반도 최초의 재배볍씨인 가와지볍 씨를 비롯해 우리나라의 벼농사의 역사 등과 관련한 다양한 사료를 전시해놓은 농업테마 박물관이다.

가와지란,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과 주엽동 의 경계지역으로 옛날 이곳에 큰 기와집이 있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곳 가와지터의 토탄층에서 선사시대 유물들과 함께 고대볍 가와지 볍씨 12톨이 발견되었는데 박물관에는 5,020년전 신석기시대의 가와지볍씨와 3,000년전 청동기시대의 가와지볍씨를 직접 만날 수 있다. 1991년 가외지볍씨가 발굴되기 전까지는 한반도 벼농사의 시작이 청동기시대로부터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고양 가와지볍씨의 발견으로 인해 그보나 훨씬 이전인 5020년 전 신석기시대 한강문화권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이 증명되었다.  

 

 

서오능 

사적 제198호.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

5릉은 경릉·창릉·익릉·명릉·홍릉을 일컫는다.

1457년(세조 3) 세자 장(璋:뒤에 덕종으로 추존됨)이 죽자 이곳에 안장(경릉)한 이래 1470년(성종 1) 덕종의 아우인 예종과 그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의 창릉, 1681년(숙종 7)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 1721년(경종 1) 숙종과 그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와 제2계비인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 1757년(영조 33) 영조의 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이 들어서 능의 무리를 이루었다. 그밖에 이곳에는 명종의 큰아들인 순회세자의 순창원이 경내에 있으며, 1970년에 숙종의 후궁인 희빈장씨의 대빈묘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경릉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왕의 것이 오른쪽에, 왕비의 것 이 왼쪽에 조성되지만 이것은 반대로 왕릉이 왼쪽에, 왕비릉이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 형식이다. 추존 왕 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왕릉에 나타나고 있는 난간석이나 망주석, 석수 등의 호위가 없다. 반면 왕비릉은 생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능제도에 따라 구색을 갖추었으며, 난간석의 기둥은 창릉의 형식을 따랐으므로 특이하다.

창릉도 몇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즉 상석을 받친 석족은 일반적으로 4개의 양각 귀면이지만 창릉은 문고리 모양을 조각했으므로 북과 흡사한 느낌을 준다. 또 난간석의 기둥머리는 연잎과 연주문이 보편적이지만, 창릉의 큰 석주는 둥근머리 밑에 환상받침을 마련하고 사각 석주로 변천되어가는 형식을 하고 있어 당시 일부 남 아 있던 고려 왕릉의 석주양식을 반 영한 것으로 보 인다.

명릉은 조선 능제의 분수령이 되는 것으로서 그 특 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석물의 치수를 실물에 가깝게 했으며 부장품의 수량도 감소했다. 둘째, 문 인석의 미소와 무인석의 늘어진 투구와 이마에 새긴 투구의 파상선 등은 1649년에 조영된 장릉 석인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셋째, 8각의 장명등, 옥개를 4 각형으로 제도화했다. 그리고 익릉은 기본적으로 〈국조오례의〉 제도를 따르고 부분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서오능

홍릉은 명릉보다 20일 늦게 조성했으므로 상설제도나 석물양식은 거의 비슷하다. 가령 문인석은 용모나 복식상태 등에 있어서 그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한 특징을 보여준다. 

 

자료출처 :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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