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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제 99주년 3.1운동 기념 행사

하남문화원윤재민 │ 2018-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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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5

하남문화원은 지난 3월1일 10시, 시청앞 하남 3.1운동 기념비에서 99주년 3.1운동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이날 행사는 하남의 독립운동가 김교영 선생의 후손인 김학철 선생과 하남문화원 임원 및 회원, 정치인 등 30여명이 참여하여 독립을 위하여 고군분투하신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들에 대한 헌화와 분향을 올렸으며, 기미독립선언문 낭독과 만세삼창을 부르며 하남의 3.1운동 정신을 기렸다.

금번 행사는 하남 3.1운동 기념비가 건립되기 전 여러 해 동안 유병기 문화원장과 김기영 주민자치협의회장, 그리고 뜻있는 회원들이 1919년 3.1운동 당시 주민들이 모여 만세를 부르던 천현동의 매봉에서 간단한 제례와 만세를 부르며 하남의 3.1 독립정신을 기려왔으나, 하남 3.1운동 기념비 건립과 함께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약식으로 치러진 행사이다.

하남문화원은 2019년은 3.1만세운동이 100주년 되는 해 이므로 전체 시민들이 참여하는 행사로 규모를 확장시켜 나갈 계획이며, 이를 토대로 우리 하남의 시민들이 3.1만세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장으로서 애향심의 원천이 되도록 할 계획이다.

 

 

하남시 3.1독립 운동 약사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 이후 일본의 조선총독부 통치는 한민족의 항일독립투쟁과 각지의 의병을 낳았고 민족계몽운동으로 발전하여갔다. 일본은 이와 같은 민족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이른바 헌병경찰 제도를 실시하여 항일독립운동 투사들을 학살 투옥하고 일체의 결사(結社)와 언론활동을 금지하였으며 교육정책에 있어서도 우민정책(愚民政策)을 실시하여 민족의식의 성장을 억누르고 한국의 고유문화를 말살하며 토지, 광산, 철도, 금융 등 모든 이권을 독점하여 한민족의 경제발전마저 극도로 제한하는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폭압은 지식인 학생 종교인들뿐만 아니라 농업인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의 반일감정(反日感情)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무단정치의 시련을 겪고 있을 무렵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제창되고 1919년 1월 22일 고종황제가 갑자기 승하하자 일본인들에 의한 독살설이 급속히 유포되어 일본에 대한 증오는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이에 천도교의 손병희, 그리스도교의 이승훈, 불교의 한용운 등 종교계 인사를 주축으로 한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를 제정 인쇄하여 각계에 배포하고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니 이를 기점으로 전국 각처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만세운동이 약 1년여에 걸쳐 들불처럼 번져 일어나니 이 운동이 3.1독립운동이다.

우리 하남시 지역은 당시 동부면, 서부면, 중부면 일부가 광주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하남시 지역은 서울과 연접지역으로 이천과 여주는 물론 충주지역으로 통하는 경충국도(京忠國道)의 통과지역이면서 한강의 수로(水路)를 따라 충청과 강원내륙까지 왕래하던 보부상과 뱃사공의 뱃길이 열려있는 교통요지로서 서울의 3.1독립운동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지역이다. 하남지역의 양반 지식층 지도자인 이대헌(李大憲), 김교영(金敎永), 김홍렬(金弘烈), 구희서(具羲書) 등은 서울의 만세시위 소식을 접하고 하남에서도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사전 결의하고 천주교 교인과 농업인 등 주민들을 모아 일시에 행동에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들이 살고 있던 하남의 네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연합시위로 이어진 경과를 보아도 짐작이 가능하다. 그들은 1919년 3월 26일부터 주민들을 연통(連通)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준비에 들어가 다음날 3월27일 새벽 02:00경부터 각 동리 산에 올라 횃불을 신호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고 이어서 11:00경에는 소속된 동부면과 서부면사무소로 각각 장소를 옮겨 함께 시위를 벌인 뒤 오후에는 대열을 헌병주재소가 있던 구천면 상일동으로 이동하여 동부면, 서부면, 구천면 주민이 합세한 1천여 명의 연합시위대를 구성하여 투석 등 격렬한 시위를 벌이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당시 광주군에서는 처음으로 사망자 1명과 부상자 2명이 발생하고 시위를 주도하였던 네 사람은 모두 체포되어 손톱이 뽑히는 등 모진 고문 끝에 재판에 넘겨져 1년여의 옥고를 치러야 하였다. 이러한 하남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당시 광주군 3.1독립만세운동의 실질적 시발점(始發點)이며 모태(母胎)로서 이후 다른 면으로 확산되어 보다 적극적이며 광범위한 항일 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 운동이 하남시 3.1독립만세운동이다.

하남시 지역의 독립 유공자

이대헌(李大憲) 동부면 교산리 만세시위 주도 건국훈장 애족장

김교영(金敎永) 동부면 망월리 만세시위 주도 건국훈장 애족장

김홍렬(金弘烈) 동부면 풍산리 만세시위 주도 건국훈장 애족장

구희서(具羲書) 서부면 풍산리 만세시위 주도 대 통 령 표 창

이대헌(李大憲)의 샘재 독립만세운동

이대헌(1883.11.14-1944.6.8.)은 하남시 교산동 160 출신으로 샘재는 교산동과 천현동의 자연부락 이름이며 함평이씨 양반 집성촌이다. 그는 10대를 이어서 샘재에 세거한 함평이씨(咸平李氏) 함성군(咸城君)파의 포장공(捕將公) 이백복(李伯福)후손으로 아버지 이민겸(李敏謙)과 어머니 기계유씨(杞溪兪氏)사이에 2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매사에 절도가 있었으며 자존심과 정의감이 강하고 신념에 찬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37세로 교산동 구장(區長)직에 있으면서 3.1운동의 당위성을 깊이 인식하고 하남에서의 독립만세시위를 위하여 1919년 3월 26일 태극기를 만들어 두었다가 다음날 3월 27일 02:00시경 샘재 마을 주민 십 수명을 대동하고 마을 동쪽에 있는 매봉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약 1시간동안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연달아 부르다가 당시 동부면사무소가 있던 천현동 동경주로 내려와 03:30경 면사무소 앞에서 약 30분간 재차 만세를 절규한 다음 04:00경 해산하였다가 다시 11:00경 주민 30여명을 재규합하여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을 때 구산(龜山)에서 올라온 김교영의 시위대와 합세하여 14:00경까지 연합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시위군중은 점점 늘어 수백 명의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시위대는 이어서 황산고개를 넘어 상일동 헌병주재소로 향하였는데 합세한 군중은 1천여 명에 달하였으며 상일동에서 동부면 서부면 구천면 주민의 연합시위대가 격렬한 시위에 나서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언도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약 13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그 후에도 요시찰인으로 일경의 감시를 계속 받아가며 여생을 살았다. 1927년 8월에는 한순회(韓順會) 한백봉(韓百鳳) 유인목(兪仁穆) 등과 함께 민족단체인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를 결성하여 간사로 활동하면서 또 다른 항일독립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김교영(金敎永)의 구산 독립만세운동

김교영(1858.12.20-1923.5.9)은 하남시 망월동 323 출신으로 구산은 경주김씨(慶州金氏) 계림군(鷄林君)파 후손이 7대째 세거하는 양반 집성촌이다. 아버지 김원희(金元凞)와 어머니 청주한씨(淸州韓氏)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온 독실한 천주교 가문으로 조부 김만집(金萬集) 종조부 김문집(金文集), 김우집(金禹集)과 숙부 김차희(金次凞) 당숙 김성희(金聖凞), 김경희(金敬凞) 등 6인이 기해(己亥:1839) 병인(丙寅:1866) 양대박해(兩大迫害) 때 모두 순교(殉敎)하고 그중 김우집(金禹集:안또니오)은 성인(聖人)에 오르는 등 천주교 구산성지(龜山聖地)의 중심가문이다.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으로 주변의 신망이 높았으며 3.1독립운동 당시에는 62세로 망월동 구장(區長)직에 있으면서 전국적인 독립만세 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전해 듣고 1919년 3월 26일 밤 동리주민과 함께 구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3월 27일 조반 후 09:00경 마을 사환 김용문에게 독립만세 시위를 할 터이니 주민들을 모으라고 지시하고 가족을 포함한 주민 수십 명을 인솔하여 동부면사무소가 있는 천현동 동경주를 향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11:00경 면사무소에서 이대헌의 샘재 시위대와 합세하여 14:00경 까지 연합시위를 벌인 뒤 이어서 수백 명의 군중은 상일동에 있는 헌병주재소를 향해 행진하면서 만세를 외치니 시위군중은 더욱 늘어났다. 상일동 헌병주재소에 도착한 시위대는 구희서의 서부면시위대 및 구천면 시위대와 합세하니 시위 군중은 1천여 명으로 늘어나고 헌병주재소와 구천면사무소에 투석하는 등 격렬한 시위가 이어지자 다급해진 일본헌병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1명의 희생자와 2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시위는 종료되었는데 이때 그는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약 1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김홍렬(金弘烈)의 황산 독립만세운동

김홍렬은 하남시 풍산동에 거주하는 34세의 양반출신 농업인으로 3.1독립선언서의 취지에 공감하고 본인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도 주민을 모아 독립만세운동을 하고자 1919년 3월 26일 오후 22:00경 주민들에게 만세운동을 하도록 권유 설득하여 동리주민 20여명을 모아 동리 산위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3월 27일 03:00경까지 조선독립만세를 연달아 외치다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 수감기간을 포함 약 1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구희서(具羲書)의 감일 독립만세운동

구희서(1872.11.6-1951.2.7)는 하남시 감일동 246 출신으로 능성구씨(綾城具氏)이다. 감일동은 능성구씨 집성촌으로 조선 세조 때 영의정을 역임하고 청백리에 오른 충렬공 구치관(具致寬)의 현손(玄孫)인 조선 중종 때 1등 공신 구징(具徵)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양반 집성촌이다. 3.1운동 당시 그는 48세로 대한독립을 위한 시위에 참여하고자 1919년 3월 27일 그가 거주하는 감일동 주민 약 40여명을 규합하여 당시 서부면 사무소가 있던 초이동 지지미마을로 이동하여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인 다음 오후에는 헌병주재소가 있던 상일동에 진출하여 동부면 구천면시위대와 함께 격렬한 연합시위를 벌였는데 이때 일본 헌병의 발포로 사망한 1명이 그가 인솔하였던 서부면 시위 대원이었다. 그는 체포되어 징역 8월을 언도받고 미결수기간을 포함 서대문 감옥에서 약 11개월의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