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사랑받는 하남문화원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김용기(金容基) : 1909년(융희 3) ~ 1988년
하남문화원 │ 2014-06-01 HIT 2766 |
|---|
농민운동가이다. 호는 일가(一家)로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봉안 마을에서 1909년 아버지 김춘교와 어머니 김공윤 사이의 5남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생활하며 우리 문화를 기독교와 접목시키려는 노력을 어려서부터 하였다. 특히 여운형이 세운 광동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여운형의 민족 구원의 지도 이념을 충실히 따르게 되었다. 1929년 김봉희와 결혼하여 1984년 1월 사별할 때가지 55년간 황무지 개척의 동반자로 함께 일했다.
1931년 고향인 봉안에 봉안 이상촌을 건설하여 환경개선·식생활 개선·의생활 개선·농업기술 보급과 새로운 국민의례를 창안하여 상·혼·제례를 간소화하고, 부락 협동기능을 강화하여 협동조합을 통해 부락의 공동이익을 높이며, 애국지사를 후원하는 등 정신개조를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54년 11월 16일 하남시 풍산동에 정착, 황무지를 개척하여 가나안농장을 가꾸었으며, 1962년 2월 1일 근로·봉사·희생정신을 내걸고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하였다. 가나안농군학교는 정신 개척의 도장으로 김용기의 개척정신을 구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의식의 혁명·생활의 혁명·인격의 혁명을 중요한 교육과제로 하였다. 가나안농군학교의 설립은 경제개발계획과 맞물려 국가가 펴는 국민운동과 맥을 같이 하였기 때문에 국가적 관심도 컸다. 1970년에는 풍산동 지역 주민과 함께 가나안신용협동조합을 조직하여, 18년만에 조합원 10,000여명, 자산규모 150억을 보유하는 건실한 조합으로 성장하여, 저축의 생활화와 주민의 화합과 신용사회건설에 크게 이바지했다. 또 가나안복민회(復民會)를 1973년에 설립하여 원성군 신림에 설치한 제2농군학교와 제1농군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복민 운동의 실천기반을 확보하였고, 다음해에는 복민주의 연구실을 설치하여 복민 사상의 이론이 체계화 되도록 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는 1980년 가나안농군학교를 수료한 수료생을 중심으로 일가회(一家會)를 조직하여 복민운동의 주체로 키웠다. 자녀들도 복민운동의 역군으로 교육시켜, 세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두 딸과 사위 모두가 가나안의 식구로 일하고 있다. 또 학교를 설립하여 죽을 때까지 351,114명의 사회지도자·종교지도자·공무원·군인·농부 등 다양한 계층을 교육시켰다. 1966년 8월 31일 사회교육의 공로를 인정받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고, 1988년에 죽었다. 저서로는 『참 살길 여기에 있다』, 『이렇게 살 때가 아닌가』, 『심은대로 거두리라』, 『증 젊음에게』, 『운명의 개척자가 되자』, 『그분의 말씀을 따라』, 『나의 한길 60년』, 『조국이여 안심하라』, 『영광된 내일을 위하여』,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 있다.
<참고문헌>이철재, 『하남의 역사』, 피플뱅크, 19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