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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김종수(金鐘秀) : 1728년(영조 4) ~ 1799년(정조 23)

하남문화원 │ 201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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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풍(淸風)이고, 자는 정부(定夫)이며, 호는 진솔(眞率)·몽오(夢梧)이다. 서울출신으로 우의정을 지냈던 김구(金構)의 증손자이며, 시직(侍直) 김치만(金致萬)의 아들이고, 교리 윤득경(尹得敬)의 사위이다. 1768년(영조 44)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홍문관 부수찬을 지내고, 왕세손 시강원 필선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외척의 정치관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리론이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뒷날 정조의 지극한 신임을 얻게 되었다. 1772년(영조 48) 청명(淸名)을 존중하고 공론을 회복하여 사림정치의 이상을 이루려는 청명류의 정치적 결사에 연류되었던 그는, 이 조직이 드러나게 되어, 당시 당파를 없애려는 영조에 의해 경상도 기장현의 금갑도(金甲島)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에 방면되었다. 영조가 죽자 행장찬집당상(行狀纂輯堂上)이 되었고, 이후 승지·경기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쳐 규장각 제학에 임명되었다. 1781년(정조 5) 대제학에 오르고, 그뒤 이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1789년(정조 13)에 우의정에 올랐다. 1792년(정조 16)에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가 올라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위해 역적을 토벌하자고 주장하자, 순(舜)·주공(周公) 같은 대공지정(大公至正)의 도리로서 부모를 섬기는 것이 효도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려 이에 반대하였다. 이듬해에 좌의정에 올랐으며, 1794년(정조 18) 사도세자를 위한 역적 처벌을 다시 주장한 채제공(蔡濟恭)과 함께 설 수 없다는 의리를 굽히지 않음으로써, 정조가 주장하는 탕평책에 대한 배신자로 지목되어 평해로 유배되었다가 남해로 옮겨 유배생활을 계속하였다. 이 해에 관직을 그만두고 봉조하가 되었다. 그의 사후(死後) 순조 때에는 척신인 김구주(金龜柱), 심환지(沈煥之) 등과 당파를 이루어 정조를 속이고 뒤에서 그 치적을 파괴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 하여 관직이 추탈(追奪)되었다가 곧바로 회복되었다. 1802년(순조 2) 유언호(兪彦鎬)와 함께 정조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임성주(任聖周)·윤시동(尹蓍東)·김상묵(金尙默) 등과 교류하였는데, 어려서부터 경술(經術)로써 세상에 이름났다고 하였다. 정조는 윤시동·채제공과 함께 세 사람을 자신의 의리를 조제하는 탕평의 기둥으로 지적하였다. 『문신강제절목(文臣講製節目)』을 찬진했으며, 저서로는 『몽오집(夢梧集)』이 있다. 그의 묘는 하남시 광암동에 있었으나 현재는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 산 31번지(오봉산하)로 천장 하였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 『夢梧集』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