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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능창대군(능창대군) :1599년(선조 32) ~ 1615년(광해군 7)

하남문화원 │ 201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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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의 종실로 이름은 전(佺)이며, 선조의 손자이다. 원종(元宗 : 定遠君)의 셋째 아들로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 具氏)의 소생이며 인조의 동생으로 인조가 즉위한 뒤 능창대군(綾昌大君)에 봉해졌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1615년(광해군 7) 8월 광해군은 능창군을 인정문(仁政門)에서 직접 국문하고 옥에 가두었다. 능창군이 신경희(申景禧)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는 죄수 소명국(蘇鳴國)의 무고 때문이었다. 즉, 윤길과 신경희가 한 동아리가 되어서 모든 흉모와 은밀한 계책을 몰래 서로 의논하였는데, 임금의 관상과 명운·국운의 길흉을 사사로이 멋대로 점을 치고는 능창군이 40년간 치평할 임금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의 주모자 신경희는 죽음을 당하고 능창군을 비롯한 양시우(楊時遇)·김정익(金廷益)·소문진(蘇文震)·김이강(金以剛)·오충갑(吳忠甲)은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이 사건을 신경희의 옥사라고 한다. 강화도 교동(喬桐)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능창군에게 토인(土人) 고봉생(高封生)으로 하여금 위리 안에 같이 거주하게 하고 밖에서 석회수(石灰水)로 밥을 지어 들여보냈다. 그러자 고봉생은 날마다 제 밥을 덜어서 주었다고 한다. 같은해 11월 능창군의 병이 깊었을 때, 광해군은 의원을 급히 보내 치료하게 할 뿐 아니라 별장(別將)에게 명령하여 충분히 치료하게 하고 그와 동시에 만일 신중히 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잡아다가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능창군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글을 써서 부모와 결별을 고하고 스스로 목을 메어 결국 11월 17일 위리안치된 곳에서 죽었다. 그런데 수장은 거짓으로 병이 들었다고 보고하고 곧이어 죽었다고 알렸다. 왕이 겉으로는 놀라고 괴이한 표정을 지었지만 실제로는 넌지시 유도한 것이라 한다. 어쨌든 능창군이 죽자, 광해군은 음식과 구료(救療)하는 등의 일에 대해 전교가 없었다는 이유로 구시백과 별장 이응성(李應星), 교동현감(喬桐縣監) 황정열(黃廷說)을 모두 붙잡아다 엄히 국문한 다음 죄를 정하였고, 경기도관찰사 노직(盧稷) 역시 살리지 못하였다고 추고하였다. 능창군은 호탕하고 풍도(風度)가 있었으며 궁마술(弓馬術)이 남달리 뛰어나고 외모도 훤칠하였다. 시호는 효민(孝愍)이고, 1632년(인조 10)에 대군으로 추봉되었다. 현재의 하남시 춘궁동에 장사지냈으나 1999년 봄에 묘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廣州郡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