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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밀성군(密城君) : 1430년(세종 12) ~ 1479년(성종 10)

하남문화원 │ 201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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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 종실로 이름은 침(琛)이고 자는 문지(文之)인데, 세종의 12번째 아들로 다섯 번째 서자이며, 어머니는 신빈 김씨(愼嬪 金氏)이다. 1442년(세종 24) 7월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고, 1444년(세종 26) 풍저창사(豊儲倉使) 민승서(閔承序)의 딸과 혼인하였다. 1452년(문종 2) 3월 병이 위독하게 되자, 문종이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에게 중을 모아 흥천사(興天寺)에서 기도하게 했더니 병이 나았다 한다. 세조(世祖)는 그가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며 우애(友愛)가 돈독함을 가상하게 여겨 금병(禁兵)을 맡게 하였다. 그리고 1461년(세조 7) 3월 국왕이 직접 미곡 30석(石)·황두(黃豆) 20석을 내려 주었다. 세조가 군정에 뜻을 두자 삼군진무소를 고쳐서 도총부를 만들고, 도진무를 도총관을 삼아 종실의 중신을 택하여 제수할때 가장 먼저 그 선택에 응하였다. 밀성군(이침)의 묘 1462년(세조 8) 모친상을 당하자 홀로 여막에서 예를 다하니, 사람들이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1467년(세조 13) 정월에 세조가 그를 겸오위도총부(兼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으로 삼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러 보내려 하였으나 병이 있어 교체하였다. 1468년(세조 14)에는 유도장(留都將)·유도상(留都相)을 겸하였다. 세조의 배려가 지극하여 세조가 죽자 그의 묘 자리를 보는 데 깊이 관여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 10월 남이(南怡)가 죄에 연루되어 죽을 때 수충보사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1469년(예종 1) 세종대왕의 능(영능)을 여주로 옮길 때 도제조가 되어 일을 추진하였고, 예종이 도총관으로 삼아 병권을 장악하게 하자 사양하였다. 그러나 예종은 특명으로 밀성군 이침의 셋째 아들과 넷째 아들을 군으로 봉해 주었다. 성종이 즉위하자 호위한 공이 있다고 해서 좌리공신의 호를 하사했다. 1474년(성종 5) 12월 사간원에서 종친의 범법을 탄핵하는 것에 대해 구례(舊例)에 종친(宗親)이 법을 어기면 종부시(宗簿寺)에서 규핵(糾劾)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478년(성종 9) 여름, 병에 걸려 치료했으나 다음해 정월 집에서 죽었다. 향년 50세였다. 이침은 4남 2녀를 낳았는데, 첫째 아들은 이계(李誡)로 가덕대부 운산군(雲山君)이고, 둘째 아들은 이당으로 승헌대부 춘성군(春城君)이고, 셋째 아들은 이상으로 정의대부 수안군(遂安君)이고, 넷째 아들은 이격으로 정의대부 석양군(石陽君)이다. 큰 딸은 판관 하한문(河漢文)에게, 둘째 딸은 참봉 안우하(安友夏)에게 시집갔다. 이침은 타고난 성품이 현명하고 민첩하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정중하여 집에 첩을 두지 않았고 법도를 지켰다. 이에 역대 임금의 사랑이 식지 않았고, 항상 사옹원(司饔院)·문소전(文昭殿)·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가 되었다. 성종이 시호(諡號)를 장효(章孝)라 하였고, 1782년(정조 6) 2월 효희(孝僖)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묘는 하남시 초이동에 있다. 서거정이 찬한 신도비와 함께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 『密城君神道碑』 ; 『廣州郡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