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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朴薑) : 1406년(태종 6) ~1460년(세조 6)

하남문화원 │ 201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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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고려시대 정당문학(政堂文學)이었던 박상충(朴尙衷)의 후예이자 좌의정 박은(朴訔)의 아들이다. 형제로는 박규(朴葵)·박훤(朴萱)이 있다. 1442년(세종 24) 4월 그는 대호군(大護軍)으로 의금부의 탄핵을 받아 곤장 80대를 맞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공신의 후예라는 이유로 관직만 파면되었다. 다음달에도 탄핵이 계속되자, 세종이 황희(黃喜)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의논한 대신들이 “이 사람들의 죄는 불경(不敬)에 관계되니 마땅히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곤장을 집행하여 그 나머지 사람들을 징계해야 될 것입니다”고 건의하니, 국왕이 그대로 따랐다. 1444년(세종 26) 대호군을 거쳐 이듬해 군기감정(軍器監正)에 임명되고 특별히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한 계급이 올려졌다. 이어 판사를 거쳐 1447년(세종 29) 12월 평안도 경차관으로 임명되어 평안도를 순시하는 직무를 다했으며, 다음해 2월에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그후 1449년(세종 31) 2월 공조참의, 5월 이조참의를 지낸 후, 8월 평안도 도진무로 요동 변란을 막았다.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450년(문종 즉위) 8월 황해도 도절제사(黃海道都節制使)가 되었으나, 같은달 말에 하직하였다. 그뒤 1450년 3월 황해도 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 판해주목사, 1452년(단종 즉위) 12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10월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으나, 11월 다시 중추원부사에 임명되었다. 그뒤 1455년(단종 3) 9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협력하였다. 그 공으로 그는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3등에 정해지고 금천군(錦川君)에 봉해졌다. 1456년(세조 2) 7월 경상·전라·충청 삼도순찰사(慶尙全羅忠淸三道巡察使)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다음해 정월 충청·전라·경상도의 도순찰사(都巡察使)로서 부사(副使) 구치관(具致寬) 등과 함께 경상·전라·충청도의 여러 진(鎭)과 포(浦)를 순시하고 사건을 낱낱이 열거하여 기록하였다. 1457년(세조 3)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8월 좌상대장, 9월 지중추원사를 거쳐 1458년(세조 4) 6월에 좌익 3등공신으로 정해졌다. 1459년(세조 5) 정월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 7월 황해도 도순찰사(黃海道都巡察使), 9월 중추원사, 10월 우상대장(右廂大將), 1460년(세조 6) 정월 중추원사를 지냈다. 그는 특히 무예에 능했는데, 왕이 양녕대군(讓寧大君)과 박강에게 활을 쏘게 하니, 박강이 많이 맞혀 내구마(內廐馬) 1필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사냥에도 능해서 1460년(세조 6) 10월 세조가 황주진(黃州鎭)·해주진(海州鎭)·수안진(遂安鎭)의 군사를 합쳐 주엽산(走葉山)에서 사냥하게 하였는데, 호랑이 한 마리와 노루·사슴·여우·돼지 등 40여 마리를 잡았다. 박강은 1460년(세조 6) 11월 7일 죽었는데, 세조가 쌀·콩 40석, 종이 100 권, 유둔(油芚) 4부를 부의(賻儀)하였다. 박강은 성품이 정교하고 재주가 많았다고 한다. 시호(諡號)는 세양(世襄)이며, 묘는 하남시 초이동에 있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 『朴薑神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