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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박자흥(朴自興) 1581년(선조 14) ~ 1623년(광해군 15)

하남문화원 │ 201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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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흥(朴自興) 1581년(선조 14) ~ 1623년(광해군 15)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밀양, 원래 이름은 흥립(興立), 자는 인길(仁吉)이다. 병조판서 박계현(朴啓賢)의 증손이고, 지돈영부사 박안세(朴安世)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이다. 어머니는 청풍 김씨로 1581년(선조 14) 서울 낙산에서 태어났다. 1601년(선조 34) 감시(監試)에서 진사에 급제하였고,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이때 고시관이 아버지 박승종과 장인 이이첨(李爾瞻)이었기 때문에 물의를 빚었다. 1611년(광해군 3) 5월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었고 7월에 딸이 세자빈으로 책정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벼슬이 정2품 전적으로 올랐다. 1612년(광해군 4)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고, 세자시강원 사서를 겸임하였다. 이조정랑을 거쳐 1616년(광해군 8)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그뒤 형조참의·전라도관찰사·홍문관 부제학·형조참판을 지냈다. 1621년(광해군 13)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고, 1623년(광해군 15) 경기도 관찰사를 재직하고 있을 때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그는 아버지 박승종과 함께 반정군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박자흥은 이이첨의 사위로서 서로 반목하였지만, 인목대비 폐비 논의 과정에서 형조참판으로 페비절목을 정하는 일에 앞장섰다. 딸이 세자빈이 된 뒤, 권세를 얻어 민전을 탈취하고 사치하여 원망을 사기도 했다. 그의 묘는 감이동 정림에 있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 『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