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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산군(운산군) : 1453년(단종 1) ~1510년(중종 5)
하남문화원 │ 2014-06-01 HIT 26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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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 종실로 아버지는 세종의 12자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이고, 어머니는 여흥 민씨이다. 이름은 계(誡), 자는 신옹(愼翁)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세조의 귀여움을 받았다. 12세에 정의대부(正義大夫)를 제수받고, 세조가 직접 사서(史書)와 경서(經書)를 가르쳤다. 그뒤 그는 밀지를 잘 받들어 정2품 승헌대부(承憲大夫)에 올랐으며, 1468년(예종 즉위) 10월에 운산군(雲山君)에 봉해졌다. 성종이 즉위한 후, 1472년(성종 3) 정월 종묘에 부제할 때 헌관인 그에게 안구마(鞍具馬) 1필을 하사하고, 1484년(성종 15) 4월 소덕대부(昭德大夫) 운산군(雲山君)으로 봉하였다. 이듬해 4월 다시 흥록대부 운산군(雲山君)으로 삼았고, 흥록상전 종부시(興祿常典宗簿寺)의 도제조(都提調)에 이르렀다. 일을 시행하는데 너그럽고 가혹하지 않아, 종실들이 공경하여 감히 잘못을 저지르지 못했다고 한다. 또 문소전(文昭殿)과 사옹원(司饔院)의 일을 주관할 때에도 어긋남이 없어 보는 이들이 뛰어나다고 하였다 한다.
1493년(성종 24) 3월 종친의 병을 살피는 것에 대한 불만스러운 점을 상소하였다. 그는 “신 등이 만약 병들었다고 보고하면 종부시에서 살펴보고도 믿지 못해 또다시 가까운 이웃에게 물어봅니다. 그러나 동반(東班)의 조사(朝士)들은 비록 참봉(參奉)만 되어도 병들었다고 보고하면 다시 묻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종친에게는 이와 같으니, 이는 전하께서 종친을 가까이 하시는 뜻에 어긋납니다”고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죄에 연루되었으나, 지위가 높고 오랫동안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를 지냈다 하여 죄를 모면하였다.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왕은 그를 가장 높은 직품인 현록대부(顯祿大夫)를 내렸다. 한편, 대신들이 연산군을 내쫓고 중종을 추대할 때 이를 도와 그 공으로 그는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509년(중종 4) 6월 종친부·종부시·사옹원의 제조가 되었으나, 대간은 그가 의롭지 않은 일을 많이 행하였기 때문에 제조가 되기에 알맞지 않은 사람이라 반대했다. 왕은 “운산군이 의롭지 못한 일을 하였는 지는 모르겠으나, 종부시의 유사는 의례로 지위 높은 종실을 임명하는 것이니 또한 교대할 수 없다”면서 거부하였다. 그러나 대간과 대신들의 계속되는 비판을 견디지 못해 벼슬을 그만 두고 조회만 받들었다. 그후 매번 대궐에 나가 문안례를 마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소일하였다.
1510년(중종 5) 12월 17일에 죽었고, 1511년(중종 6) 3월 초10일에 광주 서쪽 대덕들(大德原 : 현재의 하남시 초이동)에 장사지내고 공소(恭昭)의 시호를 내렸다. 첫째 부인은 주부 곽득륜(郭得倫)의 딸로 딸 하나를 낳고 죽었고, 재취 정씨는 김제군수 정자숙(鄭自淑)의 딸로 1460년(세조 6)에 태어나 시집왔는데 운산군을 장사지내고 4개월만에 병으로 죽으니, 이해 8월 19일 운산군의 묘에 합장하였다. 운산군과 정씨 사이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은 이갱(李戡)으로 철성군(鐵城君)이고, 둘째 아들은 이강(李鋼)으로 고성군(固城君)이며, 셋째 아들은 이전(李銓)으로 광성부정(匡城副正)이다. 딸이 3명 있었는데, 큰딸은 곽씨 소생으로 파천군(坡川君) 윤탕노(尹湯老)에게, 둘째 딸은 참봉 조신충(趙信忠)에게, 셋째 딸은 유학 송세영(宋世英)에게 시집갔다. 1518년(중종 13) 4월 28일 남곤(南袞)이 찬한 신도비가 초이동에 있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 『雲山君神道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