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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유길준(兪吉濬) : 1856년(철종 7) ~ 1914

하남문화원 │ 201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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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개화사상가이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성무(聖武), 호는 구당(矩堂)이다. 서울 계동(桂洞) 출신이며, 진사 진수(鎭壽)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이경직(李敬稙) 등에게 한학을 배웠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광주군 동부면 덕풍리(현재 하남시 덕풍동)로 피난하여 3년간 거주하였다. 이곳에 거주하는 동안 그는 서당에서 『소학』·『자치통감』 등을 읽었는데 뛰어난 글재를 발휘하여 광주 인근에 이름을 드날렸다. 1870년(고종 7)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김윤식(金允植) 등과 실학사상을 배우는 한편,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와 같은 서적을 통하여 해외문물을 습득하였다. 1881년(고종 18) 박규수의 권유로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이 되어 신사유람단에 참가,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유학생이 되었다. 이때 일본의 문명개화론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경영하는 게이오의숙〔慶應義熟〕에서 유정수(柳定秀)와 함께 수학하였다. 또 한국·중국·일본 등 동양 삼국의 단결을 목적으로 조직된 흥아회(興亞會)에도 참가하여 일본의 학자 및 정치가들과 교유하였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영익(閔泳翊)의 권유로 학업을 중단하고, 1883년(고종 20) 1월에 귀국하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主事)에 임명되어 한성 판윤 박영효가 계획한 『한성순보(漢城旬報)』 발간사업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민씨 척족세력의 견제로 신문발간 사업이 여의치 않게 되자 주사직을 사임하였다. 그해 7월 보빙사(報聘使)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도미하여 일본유학 때 알게 된 생물학자이며 처음으로 다윈(Darwin, C.)의 진화론을 일본에 소개한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시 피바디박물관장인 모스(Morse, E. S.)의 개인지도를 받았다. 가을 덤머고등학교Governor Dummer Academy〕에서 수학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유학생이 되었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이 실패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학업을 중단하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뒤, 1885년(고종 22)에 귀국하였으나,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박영효 등과 친분관계가 있었다고 하여 개화파의 일당으로 간주되어 귀국 후 체포되었다. 한규설(韓圭卨)의 도움으로 극형을 면하고 1892년(고종 29)까지 그의 집과 취운정(翠雲亭)에서 연금생활을 하면서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 1895년(고종 32) 일본 동경의 교순사(交詢社)에서 출판하였다. 서유견문 은 국한문혼용체로 서양의 근대문명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한국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개화 즉, ‘실상개화(實狀開化)’를 주장하였다. 그는 개화를 인간사회가 ‘지선극미(至善極美)’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역사가 ‘미개화 - 반개화 - 개화’의 단계를 거쳐 진보한다는 문명진보사관(文明進步史觀)을 제시하였다. 그의 문명진보사관은 종래의 상고주의사관(尙古主義史觀)을 비판하여 문명의 진보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그의 개화사상은 실학의 통상개국론(通商開國論), 중국의 양무(洋務) 및 변법론(變法論), 일본의 문명개화론, 서구의 천부인권론(天賦人權論) 및 사회계약론(社會契約論) 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으며, ‘군민공치(君民共治)’ 즉, 입헌군주제의 도입, 상공업 및 무역의 진흥, 근대적인 화폐 및 조세제도의 수립,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실시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의 개화사상에 나타난 개혁론은 갑오경장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한 청일전쟁과 함께 수립된 내각에 참여, 외아문참의 겸 군국기무처회의원(外衙門參議兼軍國機務處會議員)·도찰원도헌(都察院都憲)·내각총서(內閣總書)·내무협판(內務協辦)·내부대신(內部大臣) 등의 요직을 지내면서 갑오경장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1895년(고종 32) 10월에 을미사변의 뒷수습을 위하여 일본 공사 이노우에〔井上馨〕와 접촉하는 한편, 내부대신이 되어 단발령을 강행함으로써 보수적인 유림과 국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1896년(건양 1)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일내각이 붕괴되고 친로내각(親露內閣)이 수립되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한국인 청년장교들이 조직한 일심회(一心會)와 연결, 쿠데타를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사건이 양국간의 외교분규로 비화되자 일본정부에 의하여 오가사와라섬〔小笠原島〕에 유폐되었다. 1907년(융희 1) 고종이 폐위된 뒤 귀국하여 흥사단(興士團) 부단장, 한성부민회(漢成府民會) 회장을 역임하고, 계산학교(桂山學校)·노동야학회(勞動夜學會) 등을 설립하여 국민계몽에 주력하는 한편, 국민경제회(國民經濟會)·호남철도회사·한성직물주식회사 등을 조직하여 민족산업의 발전에도 힘을 쏟았다. 1908년(융희 2) 2월에는 강구회(講舊會)를 조직하였다. 또 1909년(융희 3)에는 국어문법서인 『대한문전(大韓文典)』을 저술·간행하였고, 1910년(융희 4)에 훈일등태극대수장(勳一等太極大綬章)을 받았다. 일진회의 한일합방론에 정면으로 반대하였으며, 국권상실(융희 4) 후 일제가 수여한 남작의 작위를 거부하였다. 1914년 9월 30일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고 선영이 있는 하남시 덕풍동에 묻혔다가 도시개발로 인해 현재는 하남시 검단산에 이장되어 있다. 그의 저서로는 『서유견문』 외에 『구당시초(矩堂詩抄)』·『대한문전(大韓文典)』·『노동야학독본(勞動夜學讀本)』 등이 있으며, 1971년에 유길준전서 편찬위원회가 구성되어 『유길준전서』 전5권이 간행되었다. <참고문헌> 兪東濬, 『兪吉濬傳』, 一潮閣, 1987 ; 이광린, 『兪吉濬』, 동아일보사, 1992 ; 김봉렬, 『兪吉濬 開化思想의 硏究』, 경남대 출판부,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