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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유승겸(兪承兼) : 1876년(고종 13) ~ 1917년

하남문화원 │ 201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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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이자 교육자이며, 대한제국 관리이다. 자는 응조(應祖)이고 호는 동은(東隱)이다. 1876년(고종 13) 2월 29일(음)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덕풍리(현재의 하남시 덕풍동)에서 유효준(兪孝濬)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덕수 이씨(德水 李氏)와 결혼하여 차순(且順)·우순(又順)을 두었고, 형 유창겸(兪昌兼)의 차남 욱(煜)을 양자로 입양하였다. 유길준(兪吉濬)과는 7촌인데, 서울 계동(桂洞)으로 이사가 유길준의 동생 유성준(兪星濬)과 앞뒤 집에 살며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냈다. 계산학교(桂山學校)를 졸업하고, 1895년(고종 32) 3월 19세에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5월 도일하였다. 일본에 가서는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보통과에 입학하였다. 이때 유길준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게이오의숙 보통과·고등과를 마치고, 전수학교(專修學校) 이재과(理財科)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1900년(광무 4) 9월부터 1901년(광무 5) 12월까지 일본 대장성 사무견습과정을 마치고 1902년(광무 6) 3월 귀국하였다. 이후 국내에 들어와서는 관리로 생활하면서 강의와 저술에 힘썼다. 주요 공직생활의 기록을 보면,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탁지부건축소사무관(度支部建築所事務官)·탁지부서기관(度支部書記官) 등을 역임하는 등 초기 탁지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5년 4월부터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경제학 담당 강사로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제자로는 박승희(朴承熙)·주정균(朱定均)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농상공학교(農商工學校) 교관으로 경제학을 강의했고,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도 후진을 양성했던 것 같다. 유학시절 당시 일본 경제사상의 주류는 독일의 신구 역사학파 경제학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일본내의 분위기와 당시 수학했던 전수학교의 자유주의적 경제학, 강단 사회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자유주의적 사상과 사회개량주의적 사상을 체득하게 되었다. 또한 개인의 노력이 사회경제 발전의 근본이라는 전제 아래, 놀고먹는 자를 사회의 공적(公敵), 나아가 사회의 대적(大賊)이라고 하였다. 이와 함께 자유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경제사상을 갖고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서는 반기를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 상류사회의 모고심(慕古心)을 비판하며, 인시제의(因時制宜)를 주장하여 근대화에 대한 선진적인 사상도 피력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식민지가 되자 탁지부 관리의 직에서 물러나고 동시에 부인을 잃었다. 이후 9개월 동안 조선총독부 군수로 전라북도 흥덕군(興德郡)과 정읍군(井邑郡)에서 근무했다. 이와 함께 경성조선인상업회의소(京城朝鮮人商業會議所) 특별의원(特別議員), 한성은행(漢城銀行) 평양지점 부지배인, 대구지점 부지배인 등을 역임했다. 1917년 4월 6일 2년여의 투병생활 끝에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으고 남긴 재산이 없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모금으로 장례를 치르고, 유해는 고향인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현재의 하남시) 선영에 안장되었다. 주요 논문과 저서를 보면, 먼저 논문은 「희망에 대한 행위의 득실」(『친목회회보(親睦會會報)』 5), 「경제학」(『소년한반도(少年韓半島)』 2), 「경제서를 독(讀)하다가 유자(儒者)의 현상을 탄(歎)함」(『대동학회월보』 3), 「개인의 노력은 사회경제의 근본」(『법학협회잡지(法學協會雜誌)』 1), 「누진세주의(累進稅主義)의 가부(可否)」(『법학협회잡지』 1) 등이 있다. 또한 저서로는 『중등만국사(中等萬國史)』(유일서관, 1909), 『최신경제교과서(最新經濟敎科書)』(유일서관, 1910)가 있다. <참고문헌> 『大韓帝國官憲履歷書』 ; 『舊韓國官報』 ; 『每日申報』 ; 李基俊, 『韓末西歐經濟學導入史硏究』, 一潮閣,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