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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유홍(兪泓) : 1524년(중종 19) ~ 1594년(선조 27)

하남문화원 │ 201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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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지숙(止叔), 호는 송당(松塘)이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유기창(兪起昌)의 증손, 예조판서 유여림(兪汝霖)의 손자, 증영의정 유관(兪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의령 남씨(宜寧 南氏)로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 남충세(南忠世)의 딸이다. 유홍은 11세에 부친을 여의었으나 힘써 공부하여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으로 들어가면서 벼슬하기 시작하였다. 1555년(명종 10) 기사관, 같은해 7월 예문관 검열을 역임하였고, 1557년(명종 12) 정월 강원도 어사가 되어 민심을 수습하였다. 같은해 4월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는데, 남쪽지방이 왜란을 겪자 경상우도 평사(評事)로 천거되었다. 이듬해 4월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6월 병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559년(명종 14) 정월 홍문관 부수찬, 3월 홍문관 수찬, 같은달 병조좌랑, 4월 사간원 정원, 6월 사헌부지평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이량(李樑)의 권력남용을 탄핵하였다가, 1559년(명종 14) 8월 병조정랑, 1560년(명종 15) 5월 이조좌랑, 1561년(명종 16) 5월 경기도사(京畿都事)로 좌천되었다. 1562년(명종 17) 4월 병조정랑, 1563년(명종 18) 5월 홍문관 교리, 6월 병조정랑을 지내고 12월 사헌부 장령, 1564년(명종 19) 정월 사헌부 집의를 역임하였다. 이때 유홍은 시사를 논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 때문에 2월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교체되었다. 그후 감시(監試)의 고시관으로서 이이(李珥)에게 장원을 주었다. 1565년(명종 20) 2월 홍문관 응교, 3월 의정부 사인이 되었고, 문정왕후의 상사(喪事)에 산릉도감으로 치산을 맡아 그 공로로 통정계(通政階)에 오르고, 조금 뒤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올랐다. 부모의 봉양을 위해 춘천부사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호조참의가 되었다가 충청도·전라도의 관찰사에 임명되었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1573년(선조 6) 7월 회령부사가 되었으며, 다음해 3월 개성유수(開城留守)가 되었다. 얼마 뒤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고, 복을 벗은 1578년(선조 11) 11월 다시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어 한성부 우윤, 형조참판, 호조참판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2년(선조 15) 6월 특별히 가자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 판윤에 올랐고, 공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다. 그때 조정에서는 평안도의 일을 걱정하여 그를 특별히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그해 연말 지중추부사로 내직에 들어왔고 1587년(선조 20) 10월 사은사(謝恩使)로 차출되어 서장관(書狀官) 윤섬(尹暹)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 다음해 5월 선조는 모화관(慕華館)에 나가 칙서를 맞이하고 유홍에게 자급을 올리고 전 30결, 노비 5구(口), 그리고 가사가정목(家舍價正木) 30동을 하사하였다. 이는 사은사 유홍이 황제로부터 망룡의를 하사 받았기 때문이었다. 유홍이 선조에 의해 특별히 가자(加資)된 것은 명나라에서 『대명회전(大明會典)』이 거의 완성되자, 선조는 명 조정에 청해서 얻어오게 하였다. 유홍은 명 조정의 예부(禮部)를 찾아가 자문(咨文)을 건네주고 『대명회전』을 청하였다. 그러나 예부에서는 아직 황제의 어람(御覽)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을 먼저 주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유홍 일행이 간곡히 청하니, 예부상서(禮部尙書) 심리(沈鯉)가 그 정성에 감동하여 제본(題本)을 갖춰 순부(順付)를 주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허락하여 부권(付卷)이 특별히 하사되고 칙서까지 내려졌다. 1589년(선조 22) 좌찬성으로서 판의금부사를 겸임할 때, 정여립(鄭汝立)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에 연류되어 체포된 자가 매우 많았다. 유홍은 옥사에서 형을 함부로 쓰는 경우가 많다면서 은혜를 베풀 것을 청하여 풀려난 사람들이 많았다. 1590년(선조 23) 8월 광국공신(光國功臣)·평난공신(平難功臣)의 녹권(錄卷)을 받았다. 광국공신은 왕실의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한 공이고, 평난공신은 역적을 토벌한 공이다. 유홍은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 1등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一等功臣)과 협책평난 2등공신이 되었으며,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해 12월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다음해 2월 교체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홍은 경성(京城)을 지켜 사직과 함께 죽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신립(申砬)의 패전이 전해지고 선조가 평안도 방면으로 피난가자, 그는 선조를 수행하여 평양에 이르렀다. 이때 선조가 요동으로 건너가 명에 의지하려 했는데, 유홍은 선조의 요동행을 반대하였다. 같은해 5월 우의정에 임명된 그는 일본군이 점차 압박하자 왕비를 모시고 함경도로 피난하려다가 다시 행재소로 되돌아오기도 하였다. 한편, 명으로의 내부(內附)를 꾀하던 선조는 세자 광해군에게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강계로 가 국가의 부흥(復興)을 도모하라 하고 조정의 신료들을 양조(兩朝)에 나누어 속하게 하였다. 이때 유홍은 종묘사직을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면서 세자를 따르겠다고 청하였다. 같은해 7월 유홍은 세자를 모시고 강계(江界)로 피난하였다. 강계로 간 세자는 강계가 벽지이기 때문에 전국에 명령이 미칠 수 없다면서 영을 넘어 동북으로 들어가 사방에 호소하고 요해지(要害地)를 지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이미 관북까지 진격하여 하는 수 없이 관서로 되돌아 왔다. 당시 여러 사람의 의견이 임시방편으로 묘사(墓社)의 신주(神主)를 땅에 묻어 두자고 하였다. 유홍은 이런 제안을 반대하며 세자를 모시고 이천에 이르렀다. 도착한 뒤, 각 도에 글을 띄어 일본군을 토벌할 것을 회유하자, 조정의 소재를 알지 못해 우왕좌왕하던 백성들과 의병들이 모두 광해군의 명령을 받들게 되었다. 유홍은 조정을 강화로 옮겨 충청도와 전라도의 군사를 모아 경성을 회복하고자 청했다. 그러나 조정의 공론은 불가하다고 하자, 그는 일선에 나가 장군들을 독려하겠다고 청했다. 이에 세자 광해군이 유홍을 도체찰사로 삼으니, 언관은 유홍이 늙었다면서 임용을 반대하였다. 그후 경성에 주둔한 일본군이 물러가자, 선조는 유홍에게 먼저 경성에 가서 정리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유홍은 서울로 들어와 불탄 도성을 정리하고 전쟁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호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선조가 경성에 돌아오자, 유홍은 왕비와 함께 해주(海州)에 머물면서 시사 10여 조를 적은 차자를 올렸다. 이 글에는 남들이 말하기 꺼려하던 대목이 많았기 때문에 반대파의 공격을 받았다. 1594년(선조 27) 11월 우의정에서 다시 좌의정으로 승진하였으나, 유홍은 사직소를 올렸다. 그는 인품과 벼슬이 맞지 않아 여러 차례 물의를 일으켰고 나이가 많아 질병이 많으니 빨리 정승의 직책을 그만두도록 명하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러나 선조는 대신이 사퇴할 때가 아니라면서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러한 왕명에도 불구하고, 사헌부는 같은해 12월 14일 유홍의 체차를 청하였다. 사헌부의 강력한 체차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그에 대한 신임을 두텁게 가졌지만 결국 유홍은 체직되었고 곧이어 죽었다. 전 부인 이씨(李氏)는 교리 이준인(李遵仁)의 딸로 을축년에 44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는데 뒤에 정경부인이 되었다. 후 부인 김씨(金氏)는 서령(署令) 김광열(金光烈)의 딸이다. 이씨(李氏) 부인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 유대술(兪大述)은 옥천군수, 둘째 아들 유대건(兪大建)은 대사간, 셋째 아들 유대진(兪大進)은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딸은 현감 김탁(金琢)에게 출가하였다. 한편 김씨(金氏) 부인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유대일(兪大逸)은 삼척부사를 역임하였고, 딸은 모관(某官) 김집(金集)에게 출가하였다. 그는 남효온(南孝溫)의 『추강집(秋江集)』을 초간하였으며, 유저로는 『송당집(松塘集)』 4권이 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묘와 신도비가 하남시 하산곡동에 있는데, 1813년(순조 13)에 세워진 신도비는 이조판서 장유(張維)가 짓고 자손인 유한지(兪漢芝)가 쓰고 아울러 전액하였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 『兪泓神道碑』 ; 『京畿人物誌』 ; 『서울六百年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