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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화(李能和) : 1869년(고종 6) ~ 1943년
하남문화원 │ 2014-06-01 HIT 31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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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자현(子賢)이고, 호는 간정(侃亭)·상현(尙玄)·무무(無無)·무능거사(無能居士)이다. 1869년(고종 6) 1월 19일 충청북도 괴산군 이도면 수진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이원긍(李源兢)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15세에 정인호(鄭仁鎬)와 혼인하고, 20여 세에 아버지를 따라 한양에 왔다. 이때부터 격동하는 당시의 내외정세를 알고 국제문물에 접하기 위하여 정동영어학교, 한성한어학교를 다니며 영어·중국어 등 외국어 습득에 전력하였다. 1895년(고종 32) 관립법어학교(官立法語學校)에 입학하였으며, 남달리 성적이 뛰어나 1897년(광무 1) 졸업 전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불어를 가르쳤다.
1906년(광무 10) 10월 관립한성법어학교 교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1909년(융희 3) 법어학교·영어학교·일어학교 등이 통합되어 관립한성외국어학교 학제가 시행될 때 학감으로 취임하여 1910년(융희 4) 학교가 폐쇄될 때까지 불어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 겸직으로 1902년(광무 6) 7월 칭경예식사무소 위원직(稱慶禮式事務所委員職)을 맡았고, 1907년(융희 1) 3∼4월 정부특명으로 일본의 관청을 시찰하고 온 뒤, 7월에는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 위원직을 맡아보았다.
한일병합이 되자 1912년 따로 사립보통학교를 만들어 교명을 자신의 이름과 부인의 이름에서 각각 ‘能’자와 ‘仁’자를 따서 ‘능인(能仁)’이라 하고 3년 동안 교장으로 있었다. 그리고 한일병합 전후에 일기 시작한 불교계 계몽운동의 흐름을 타고 1915년 30본산 주지와 50여 명의 신도가 중심이 되어 서울 각황사(覺皇寺)에서 조직·발족된 불교진흥회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젊은 승려들의 추대로 불교진흥회 간사에 취임하였으며 1917년부터는 이사직을 맡았다. 『불교진흥회월보』·『불교계』·『조선불교총보』 등 불교 대중 교양잡지를 편집·발간하여 불교의 포교와 민족문화수호운동의 핵심체 역할을 수행하였다.
1922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하여 그 위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하였을 때, 이를 수락하여 15년 동안 조선사 편찬에 종사하는 한편, 종교를 비롯한 민족문화 각 분야에 걸쳐 수집한 자료를 정리·연구하고 이를 후학에 전수하기 위하여 원고를 집필하였다. 한국학 발전에 신기원을 이룩한 원고는 거의 이 무렵에 집필된 것이다. 1930년 한국학 연구를 위하여 재한 일본학자들을 중심으로 청구학회(靑丘學會)가 발족하였을 때 평의원(評議員)으로 추대되어 1939년 학회가 해산될 무렵까지 계속 관계를 맺었으며, 또 조선총독부 보물고적보존회의 위원으로 있으면서 민족문화 수호에 관심을 표하기도 하였다. 1931년 최남선(崔南善)·박승빈(朴勝彬)·오세창(吳世昌) 등과 더불어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를 설립하여 민족정신의 계몽과 앙양에 앞장섰으며, 이 무렵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조선종교사를 강의하였다. 총독부에서의 『조선사』 편찬이 일단락 된 1938년 이후에는 잠시 이왕직(李王職)에 나갔다. 이미 칠순의 노경에 접어들어 칩거하던 중 자녀들의 권유로 상경하여 1943년 4월 12일 서울 돈암동에서 74세로 죽었다. 묘는 하남시 덕풍동 선영 내에 있으며, 정부는 1962년 8월 15일 국민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한국 불교에 관한 일체 사료를 집성·망라하고 1918년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를 자비로 출판하였다. 이 책은 그의 학문적 업적 가운데에서 개척적인 명저이다. 국사학 분야에서는 1922년 12월 발족된 조선사편찬위원회에서, 그리고 그후 1925년 6월 조선사편수회로 개칭된 기관에서 『조선사』 편찬에 참여하여 주로 제4편(광해군∼경종)과 제6편(영조∼갑오개혁)을 분담하였다. 1923년 1월 8일 열린 제1회 위원회 석상에서 동료 이나바〔稻葉岩吉〕가 신라통일시대의 조선은 현대의 조선과는 그 지역이 다르고 현대의 조선에서 본다면 발해는 한 지방에 국한되었던 명칭이라고 발언하는 것을 듣고 한국사 체계에 발해사가 고구려사와 함께 들어가야 한다고 강력히 주창하였다. 특히, 건국신화는 민족정신을 발휘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실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민족적 주체의식의 뚜렷함을 엿볼 수 있다. 전통문화연구에 관한 저서로는 『조선신교원류고(朝鮮神敎源流考)』·『조선유교지양명학(朝鮮儒敎之陽明學)』·『이조시대경성시제(李朝時代京城市制)』 등을 남겼다. 또 1923, 1924년에 조선사학회에서 간행한 조선사강좌분류사특별강의에 『조선불교사(朝鮮佛敎史)』를 집필하였고, 1927년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와 1928년 『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를 출간하였다. 또 『춘향전(春香傳)』을 한시(漢詩)로 풀이한 『춘몽록(春夢錄)』·『조선유학급유학사상사(朝鮮儒學及儒學思想史)』·『조선신화고(朝鮮神話考)』·『조선십란록(朝鮮十亂錄)』·『조선의약발달사(朝鮮醫藥發達史)』·『조선사회사(朝鮮社會史)』·『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 등을 저술하였다. 이들 유고는 1959년 동국대학교에서 영인·간행한 바 있는 『조선도교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국전쟁으로 흩어져 잃어버렸다.
그의 『조선해어화사』는 우리 사회에서 천류로 버림받아 온 기생을 주제로 하여 연정·치정·색정·음행·정렬(貞烈)·시가(詩歌) 등 여러 부분에 걸쳐 그들의 생활상황과 주변에 관한 자료를 집대성한 것으로, 통혼·가족·수과(守寡)·복장·교육·연중행사 등을 중심으로 정리한 『조선여속고』와 함께 우리나라 여성사의 개척적인 명저이다. 『조선불교통사』와 함께 1968년 재판 영인되었다. 『조선기독교급외교사』는 능통한 불어를 통하여 달레(Dallet, C. C.)의 『조선교회사(朝鮮敎會史) : Histoire de (Eglise de coree)』를 이해한 뒤 조선시대의 문적(文籍)을 더듬어 기독교사의 체계를 이룩해 놓은 것으로, 이 분야 연구의 개척적 저작이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李花』 121호 ; 『韓國의 人物』(상), 新丘文化社, 1965 ; 이하중, 「無能居士 李能和 硏究」, 仁荷大 碩士學位論文, 1992 ; 신광철, 「李能和의 宗敎史學과 韓國 基督敎史 硏究」, 『한국기독교와 역사』(4), 한국기독교연구소, 19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