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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억기(李億祺) 1561년(명종 16) ~ 1597년(선조 30)
하남문화원 │ 2014-06-01 HIT 33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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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수(景受), 호는 송봉(松峰)이다. 아버지는 필주군(泌洲君) 이연손(李連孫)이고 어머니는 교리(校理) 박명견(朴命堅)의 딸이다. 삼형제 가운데 셋째로, 첫째 형 이억복(李億福)은 12살 위로 무과에 급제하여 경원부사(慶源府使)를 지냈고, 둘째 형 이억희(李億禧)는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났으며, 17세에 사복시 내승(司僕寺內乘)이 되었다. 이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경흥부사(慶興府使)·온성부사(穩城府使) 등 국방의 요직에서 전공을 세웠는데, 온성부사 시절에는 여러 여진인을 사로잡아 큰 명성을 얻었다. 특히, 1587년(선조 20) 첫째 형 이억복이 경원부사로 있으면서 여진인의 침입으로 전사하자, 적을 추격하여 시신을 거두기도 하였다.
1591년(선조 24) 순천부사를 거쳐 임진왜란 때에는 전라우수사로 이순신·원균 등과 합세하여 당항포(唐項浦)·한산도(閑山島)·안골포(安骨浦)·부산포(釜山浦) 등지에서 적선을 대파하고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공을 세웠다. 1596년(선조 29)에는 휘하의 전선을 이끌고 전라좌·우도 사이를 왕래하면서 진도와 제주도의 전투 준비를 성원하였다. 아울러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본영을 응원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순신이 무고로 투옥되자 이항복·김명원 등과 함께 그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통제사 원균의 휘하에서 부산의 왜적을 공격하다가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패하여 원균·최호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후 공신책정 당시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으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완흥군(完興君)으로 추봉되었다. 1602년(선조 35) 여수 충민사(忠愍祠)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1616년(광해군 8) 해남의 충무사(忠武祠)에도 배향되었다.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사후에 시신을 거두지 못하여 경기도 양주 아차산(현재의 구리시 아천동) 밑에 의관으로 장사지냈다. 최근 하남시 배알미동에 후손들이 세운 신도비가 있다.
<참고문헌>『崇禎大夫完興君神道碑』 ; 『朝鮮王朝實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九里市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