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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강(李之剛) : 1363년(공민왕 12) ~ 1427년(세종 9)
하남문화원 │ 2014-06-01 HIT 27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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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잠(仲潛)으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역임한 이집(李集)의 아들이다. 그는 1382년(우왕 8) 과거에 급제하여 중서문하성의 녹사(錄事)를 거쳐 1392년(태조 1) 기거주(起居注)로서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였다. 1393년(태조 2) 6월 현빈 유씨의 일을 논하다가 순군옥에 갇혔으나, 같은해 6월 공신인 까닭에 사면되었다. 이방원(李芳遠)의 측근으로, 이방원이 즉위한 뒤 사헌부 장령으로서 풍기 단속과 개국공신의 제거에 앞장섰다.
1407년(태종 7) 4월 을과(乙科) 제2등(第二等)에 급제하고, 예문관 직제학에 특별히 임명되어 토지 40결을 하사 받았다. 곧이어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가 되어 조선초기 궁궐 수축에 힘썼으며, 수원부사가 되어 민정을 직접 다스리기도 하였다. 1411년(태종 11) 예조참의로서 충청도·전라도 경차관에 임명되어 민정을 순찰하고 관리의 탐학을 밝혀 탄핵, 파직시켰다. 그후 이조참의를 거쳐 1414년(태종 14) 12월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정월 경상도관찰사·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416년(태종 16) 한성부윤이 되어 도성의 살림을 주관하였다. 이듬해 다시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다시 내직으로 옮겨 호조참판·형조참판을 지냈다. 1418년(태종 18) 3월 사헌부(司憲府)에서 형조참판이었던 그를 상소하여 죄를 청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이지강이 이미 간원(諫院)의 탄핵을 당하여 정부와 육조(六曹)에서 함께 의논하여 죄를 정하였으니 다시 청할 수가 없다면서 이지강을 두둔하였다. 그후 곧바로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복직되었고, 3일 후 다시 호조참판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으로 임용되었다. 1419년(세종 1)에는 세종이 즉위하자 호조참의 동지경연사(戶曹參議同知經筵事)로 임명되고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평안도관찰사·이조참판을 역임하고 다시 호조참판이 되어 재정체계를 바로 잡는 데 힘썼다. 1420년(세종 2) 호조판서, 이어 1421년(세종 3) 7월 예조판서, 1422년(세종 4) 9월 호조판서, 1424년(세종 6) 6월 참찬 겸 대사헌, 참찬 등을 지내고, 1425년(세종 7) 7월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가 되어 군권을 총지휘하게 되었으나, 다음달인 윤6월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그의 묘는 할머니 인화(仁華) 제학(藝文館提學)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정월 경상도관찰사·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416년(태종 16) 한성부윤이 되어 도성의 살림을 주관하였다. 이듬해 다시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다시 내직으로 옮겨 호조참판·형조참판을 지냈다. 1418년(태종 18) 3월 사헌부(司憲府)에서 형조참판이었던 그를 상소하여 죄를 청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이지강이 이미 간원(諫院)의 탄핵을 당하여 정부와 육조(六曹)에서 함께 의논하여 죄를 정하였으니 다시 청할 수가 없다면서 이지강을 두둔하였다. 그후 곧바로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복직되었고, 3일 후 다시 호조참판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으로 임용되었다. 1419년(세종 1)에는 세종이 즉위하자 호조참의 동지경연사(戶曹參議同知經筵事)로 임명되고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평안도관찰사·이조참판을 역임하고 다시 호조참판이 되어 재정체계를 바로 잡는 데 힘썼다. 1420년(세종 2) 호조판서, 이어 1421년(세종 3) 7월 예조판서, 1422년(세종 4) 9월 호조판서, 1424년(세종 6) 6월 참찬 겸 대사헌, 참찬 등을 지내고, 1425년(세종 7) 7월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가 되어 군권을 총지휘하게 되었으나, 다음달인 윤6월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그의 묘는 할머니 인화(仁華) 제학(藝文館提學)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정월 경상도관찰사·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416년(태종 16) 한성부윤이 되어 도성의 살림을 주관하였다. 이듬해 다시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다시 내직으로 옮겨 호조참판·형조참판을 지냈다. 1418년(태종 18) 3월 사헌부(司憲府)에서 형조참판이었던 그를 상소하여 죄를 청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이지강이 이미 간원(諫院)의 탄핵을 당하여 정부와 육조(六曹)에서 함께 의논하여 죄를 정하였으니 다시 청할 수가 없다면서 이지강을 두둔하였다. 그후 곧바로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복직되었고, 3일 후 다시 호조참판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으로 임용되었다. 1419년(세종 1)에는 세종이 즉위하자 호조참의 동지경연사(戶曹參議同知經筵事)로 임명되고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평안도관찰사·이조참판을 역임하고 다시 호조참판이 되어 재정체계를 바로 잡는 데 힘썼다. 1420년(세종 2) 호조판서, 이어 1421년(세종 3) 7월 예조판서, 1422년(세종 4) 9월 호조판서, 1424년(세종 6) 6월 참찬 겸 대사헌, 참찬 등을 지내고, 1425년(세종 7) 7월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가 되어 군권을 총지휘하게 되었으나, 다음달인 윤6월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그의 묘는 할머니 인화(仁華)이씨가 있는 덕풍2동에 있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 『廣州郡誌』 ; 『城南市史』 ; 『京畿人物誌』 ; 『서울六百年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