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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李集) : 1327년(충숙왕 14( ~ 1387년(우왕 13)
하남문화원 │ 2014-06-01 HIT 2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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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의 학자이자 문인으로,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원래 이름은 원령(元齡)이고, 자는 성로(成老)·호연(浩然), 호는 묵암자(墨巖子)·둔촌(遁村)이다. 광주의 향리로 국자감 생원이었던 이당(李唐)의 아들로 안보(安輔)에게 배웠다. 1347년(충목왕 3)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전해지며,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합포종사(合浦從事)를 역임하였고,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이르렀다. 개성에 거주하고 있을 때 신돈(辛旽)의 문객이었던 채가(蔡哥)와 한 마을에 살았는데, 신돈을 미워한 이집은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채가를 배척하였다.
이 사건으로 신돈의 미움을 받아 1368년(공민왕 17) 그는 아버지를 등에 업고 가족과 함께 영천(永川)에 있는 사간(司諫) 최원도(崔元道)의 집으로 피하여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죽자 개경으로 돌아와, 그는 이름과 자·호를 한꺼번에 고쳐 이름을 집(集), 자를 호연, 호를 둔촌이라 하였다. 얼마 후 그는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바로 사직하고, 여주 천령현(川寧縣 : 여주군 금사면 이포)에 묻혀 살면서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이때 그는 김구용(金九容)과 서로 가까워 아침 저녁으로 대화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그는 사람됨이 강개(慷慨)하고 말할 때마다 정곡을 찔렀으며, 행실이 우뚝하여 절의(節義)로 자부하였다. 고려말 삼은으로 유명한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교류하였고, 학문에 있어서 명성이 높았다.
문집의 부록에 실린 삼은의 기(記)·서(序)·서(書)는 그와 이들과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문장을 지을 때 정련(精練)하고 충담(沖澹)한 필치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시에 뛰어났다. 그의 시는 꾸미거나 돌려 말하기보다 직서체(直敍體)에 의한 자연스럽고 쉬운 작품이 많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그가 조선조에 벼슬을 지냈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는데, 1611년(광해군 3) 그의 8대손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주청이 받아들여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바로 잡혀지게 되었다.
1669년(현종 10)에 건립된 광주(현재의 서울 강동구 암사동)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둔촌유고(遁村遺稿)』가 있다. 아들로 이지직(李之直)·이지강(李之剛)·이지유(李之柔) 3형제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이지직은 형조참의 보문각 직제학, 이지강은 좌참찬, 이지유는 성주(星州)목사에 이르렀다. 그후 대부분의 손자들도 과거에 합격하여 광주 이씨를 조선전기 최고의 벌족으로 만들었다. 그의 묘는 광주군(廣州郡) 세촌면(細村面) 대원리(大院里 : 지금의 성남시 하대원동)에 있다. 묘표(墓表)가 있었으나, 1633년(인조 11년) 다시 세우면서 10대손 이휴징(李休徵)이 비문을 찬하고, 11대손 이상진(李象震)이 글을 썼다.
<참고문헌>『高麗史』 ; 『朝鮮王朝實錄』 ; 『李集墓碣』 ; 『重訂南漢誌』 ; 『城南市史』 ; 『京畿人物誌』 ; 『松坡區誌』, 『서울六百年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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