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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숙영(임숙영) : 1576년(선조 9) ~ 1623년(인조 1)
하남문화원 │ 2014-06-01 HIT 28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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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천(豊川), 원래 이름은 상(湘), 자는 무숙(茂淑), 호는 소암(疎庵)이다. 한성부 판윤(判尹) 임열(任說)의 증손, 임숭로(任崇老)의 손, 정유일(鄭惟一)의 외손, 감역관(監役官) 임기(任奇)의 아들, 승지(承旨) 이상홍(李尙弘)·윤정(尹詳)의 사위이다. 천성이 곧고 지조가 개결하였으며 총명하여 10세에 시를 지었다 한다. 기억력이 뛰어나 한번 읽은 책은 잊지 않았고, 생원·진사시의 방목을 한번 훑어보고 외웠다 한다. 국조의 전고와 씨족의 원류 및 산천·도로·민요·조세 등을 모두 잘 알았으며, 천하의 지리도 그 지역을 다녀본 것처럼 알았다. 그는 4·6문을 잘 지었는데 그가 지은 통군정서(統軍亭序)는 중국 학자가 천년 이래의 절조(絶調)가 다시 해외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칭찬받았다. 이규보의 삼백운을 흠모한 나머지 율시 600운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지만, 학문하는데 게으름이 없었다. 1601년(선조 34)에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서 10년 동안 수학하였다. 논의가 과감하였으며 전후 유소(儒疏)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 1611년(광해군 3) 별시문과의 대책(對策)에서 주어진 이외의 제목으로 척족의 횡포와 이이첨(李爾瞻)이 왕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존호를 올리려는 것을 심하게 비난하였다. 이를 시관 심희수(沈喜壽)가 제일로 발탁하려다가 동료들의 만류로 병과로 급제시켰는데, 광해군이 대책문을 보고 크게 노하여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몇 달 간 삼사의 간쟁과 이덕형·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장으로 무마되어 다시 급제되었다. 그러나 한탄의 시를 지었던 권필은 매우 혹독한 고문으로 죽었고, 그를 뽑은 심희수는 벼슬을 그만두었다. 처음 승문원 정자(正字)로 관직에 올라 박사가 되었는데, 마침 봉산군(鳳山君)의 무옥(誣獄)사건이 일어나 국청의 가주서에 추천되자 병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았다. 1612년(광해군 4) 봄 승정원에 들어가 주서(注書)를 제수받았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무고하는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모든 관료들이 영창대군을 처치하라고 하자 그는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정청(庭請)에 참가하지 않았다.
당시 집권층에 대한 거침없는 극렬한 언사로 인해, 이이첨 세력은 그를 삭탈관직하고 외지로 쫓아냈다. 그는 광주(廣州)의 용진(龍津)에 은거하면서 재명(才名)이 더욱 떨쳐졌다. 오두막집에서 죽도 넉넉치 못한 생활을 하였지만 남에게서 지푸라기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마침 대궐의 영건(營建)으로 재정이 크게 모자라 속방과(贖放科)를 시행하자, 친구 한 사람이 임숙영을 구출하려고 모금하여 속(贖)을 바치고자 했다. 그러나 임숙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오히려 편지를 써서 심하게 나무랐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자 다시 관계에 나아가 예문관 검열(檢閱)로서 사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이후 홍문관 정자·박사(博士)·부수찬(副修撰)·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등을 역임하고,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이 되었다. 경연에 입시해서는 건의하고 논하는 바가 많아 왕이 즐겁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이후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승진하였다. 임숙영은 문장이 유달리 뛰어나고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고문(古文)에 힘썼고, 중국 육조(六朝)의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났으며, 저서에는 『소암집(疏菴集)』이 있다. 묘는 하남시 초일동에 위치하고 있다. 구암서원(龜岩書院)에 둔촌(遁村) 이집(李集)과 함께 제향되었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重訂南漢誌』 ; 『京畿人物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