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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장기영(張基榮) : 1916년 ~ 1977년

하남문화원 │ 201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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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인이자 언론인이며 정치인으로 호는 백상(百想)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곡물 무역상 장동후(張東厚)이고, 어머니는 고성 이씨(固城 李氏)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외할아버지 이종묵(李鍾默)에게서 한문 수학을 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한남보통학교(漢南普通學校)를 거쳐, 1934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들어갔다. 광복후 1948년에는 한국은행 조사부장으로 취임하였다. 1950년 동경지점의 개설에 참여하고 한국은행 부총재로 승진하였으나 1952년에 사임하였다. 그후 언론계에 투신, 『조선일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정부가 서울로 되돌아온 뒤 어수선하던 『조선일보』를 재건하고, 1954년 『태양신문』을 인수, 『한국일보』와 『코리아타임즈』를 창간하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57년에는 대한방송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텔레비전 시대를 열었다. 1960년에는 『서울경제신문』과 『소년한국일보』를, 1969년에는 『일간스포츠』를 창간하였고, 이어 『주간한국』과 『주간여성』등 6개의 자매지를 발행하였다. 한편, 1961년 국제신문협회 한국위원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고, 1961년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대한체육회 부회장이 되었으며, 1966년 대한올림픽위원 및 아시아경기연맹 회장으로 활약, 한국의 체육발전에 힘썼다. 1967년 국제올림픽위원이 된 것을 계기로 아시아경기대회의 유치 등 스포츠의 국제교류에 눈부신 활동을 보였다. 특히, 1961년 최초로 공산권 국가인 유고슬라비아에 우리 축구팀 단장으로 원정, 공산권과의 체육외교를 폈다. 1964년에는 정일권(丁一權) 내각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발탁되어 3년 반 동안 산업의 근대화와 경제자립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금리 현실화와 유리창 행정, 연탄의 흑백 논쟁 등 숱한 일화를 남기면서 고도성장의 기틀을 잡았다. 1964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독일 방문과 1965년 미국 방문, 그리고 1966년 태국 등 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방문을 수행하여 경제 외교에도 힘썼다. 한일간의 국교 정상화를 위하여 막후에서 일해 왔으며, 1969년 한일간의 현안 문제를 타결하기 위하여 대통령 특사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에 한일협력위원회를 창설, 창립총회 부의장이 되기도 하였다. 1971년 민주공화당 서울특별시 종로지구당 위원장에 선출된 것을 계기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어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기도 하였다. 또한 ‘10만 어린이 부모 찾기 운동’을 벌이는 등 민족 분단의 설움과 이산가족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쏟아왔는데,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1973년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측 공동위원장대리로 취임, 남북대화와 평화통일의 길을 여는 데에 앞장섰다. 정치·경제·문화·언론·체육 등 각 분야에서 활동·이바지한 공으로 수교훈장 광화장을 비롯하여 청조근정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그리고 인권옹호상·체육공로상·최고체육장을 받았다. 외국으로부터는 독일1등대십자공로훈장과 월남보국2등훈장, 중화민국1급문화훈장을 받았다. 묘는 하남시 창우동 검단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철재, 『하남의 역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