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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세(鄭基世) : 1814년(순조 14) ~ 1884년(고종 21)
하남문화원 │ 2014-06-01 HIT 28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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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성구(聖九)이고, 호는 주계(周啓)이다. 그는 정계순(鄭啓淳)의 증손이고,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정동만(鄭東晩)의 손자이며,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정원용(鄭元容)의 아들이다. 대사헌 김계락(金啓洛)의 외손이며, 김영수(金永受)의 사위이다. 우의정 정범조(鄭範朝)의 아버지이다. 정기년(鄭基年)·정기명(鄭基命)과 형제간이다.
그는 1831년(순조 31) 진사(進士)에 합격한 후, 1837년(헌종 3) 정시(庭試)에 이경재(李經在) 등과 함께 병과로 급제하였다. 1838년(헌종 4) 6월 한림소시(翰林召試)를 인정전(仁政殿)에서 베풀었는데, 홍재룡(洪在龍)·남병철(南秉哲)과 함께 뽑혔다. 이듬해 7월에는 주서(注書) 추천에서 이인기(李寅夔)·서상교(徐相敎) 등과 함께 뽑혔으며, 충청우도 암행어사(忠淸右道暗行御史)를 지냈다. 1844년(헌종 10) 도청응교(都廳應敎)를 지내고, 1848년(헌종 14)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였으며, 헌납(獻納)·장령(掌令)·병조참의·성천부사(成川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1850년(철종 1) 5월 이조참의를 지냈고, 7월 규장각 직제학을 거쳐 11월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다. 1851년(철종 2) 11월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고, 1853년(철종 4) 3월 강화도 조운의 원활한 수행을 위하여 강화부 유수에 임명되었다가 12월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1854년(철종 5) 윤7월 을해일에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봉화(奉化)의 투서(投書)한 변괴(變怪)에 관해 금성옥(琴聖玉)·김두창(金斗昌)·윤이근(尹以根) 등의 공초(供招)를 받은 것이 구절마다 의심스럽고 현혹하여 마땅히 신의 감영(監營)으로부터 모두 즉시 잡아 올려 끝까지 사실을 가려야 합니다만, 이제 이미 병영(兵營)이 상주문(上奏文)을 올린 뒤라서 처분이 있기 전에 감히 갑자기 조사할 것을 청하지 못하는 바가 있습니다”라고 하여 봉화 괘서사건을 담당하고 처리한 공로로 품계가 올라갔다. 이후 1855년(철종 6) 2월 18일 이조참판이 되었고, 11월 한성부 판윤을 거쳐, 1856년(철종 7) 정월 형조판서, 같은해 7월 다시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고, 10월에 예조판서가 되었다. 11월 그는, “헌릉(獻陵)·정릉(靖陵)·선릉(宣陵)의 봄, 가을 봉심(奉審)과 수개(修改)하는 등의 절차를 광주부(廣州府)에서 맡아 거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인릉(仁陵)을 천봉(遷奉)한 뒤 봉심과 수개하는 절차를 한결같이 세 능침(陵寢)의 예(例)에 의거해 거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일이 중대한데 관계되니 청컨대 대신(大臣)에게 하순(下詢)하시어 처리케 하소서”라고 철종에게 아뢰어 인릉의 봉심과 절차를 광주부와 똑같이 거행하게 하였다.
이후 12월에는 개성부 유수로 임명된 후 다시 품계가 올랐고, 1859년(철종 10) 5월에는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같은해 9월에는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에 임명되었다. 이어 11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체직되고 다음해 2월 다시 형조판서·판의금부사, 9월 병조판서를 거쳐 1861년(철종 12) 3월 의정부 좌참찬이 되었다. 4월에는 한성부 판윤, 7월에는 예조판서, 이듬해 5월 판의금부사를 거쳐 같은달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또한 이해 8월 다시 판의금부사로 전직한 후, 같은달 형조판서, 다음해 2월 예조판서를 제수받았다. 1862년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판의금부사와 형조판서로서 이정청 당상(釐整廳堂上)이 되었다.
고종 즉위후 권강관(勸講官)·병조판서·한성부 좌윤·『철종실록』 찬집당상·제학·우찬성을 역임하였고, 『대전회통』 편찬을 위한 교식찬집소(敎式纂集所) 교정당상(校正堂上)이 되었다. 신미양요 때에는 광주유수(廣州留守)가 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 각 조의 판서·제학·시강원 빈객을 지냈다. 임오군란 전에 수원유수로 있다가 난이 수습된 뒤에도 요충지라고 유임되었고 한성부 판윤으로 전임되었다. 제술관(製述官)과 문서사관(文書寫官)에 몇 차례 임명되었던 것으로 보아 문장과 서예에 조예가 있었던 것 같다. 묘는 하남시 교산동에 있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 『司馬榜目』 ; 『文科榜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