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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許穆) : 1595년(선조 28) ~ 1682년(숙종 8)
하남문화원 │ 2014-06-01 HIT 35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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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馬),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615년(광해군 7) 정언옹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광해군 9) 아버지 허교(許喬)가 거창현감에 임명되자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緯 : 1555∼1632)에게 가르침을 받고, 문위의 소개로 정구(鄭逑 : 1543∼1620)에게 수학하였다. 1624년(인조 2) 광주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 : 지금의 하남시 검단산)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하여 그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하였다. 1626년(인조 4)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啓運宮具氏)의 복상(服喪)문제와 관련되어 박지계(朴知誡)가 원종의 추숭론(追崇論)을 제창하자, 그는 동학의 재임(齋任)으로서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예를 혼란시킨다고 유벌(儒罰 : 유생들이 정한 벌칙으로 부황〔付黃〕이나 삭적〔削籍〕 등의 벌)을 받았다. 이에 인조는 그에게 정거(停擧 : 일정기간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는 벌)를 명하였는데, 뒤에 벌이 풀렸으나 과거를 보지 않고 검단산에 은거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영동(嶺東)으로 피난하였다가 이듬해 강릉·원주를 거쳐 상주에 이르렀으며, 1638년(인조 16) 의령의 모의촌(慕義村)에서 살게 되었다. 1641년(인조 19) 다시 사천으로 옮겼으며, 그뒤 창원·칠원 등지로 전전하다가 1646년(인조 25) 마침내 경기도 연천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해 어머니 이씨의 상을 당하자 상중에 『경례유찬(經禮類纂)』을 편찬하기 시작하여 3년 뒤에는 상례편(喪禮篇)을 완성하였다. 1650년(효종 1)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만에 그만두었다. 이듬해 내시교관이 된 뒤 조지서 별좌(造紙署別坐)·공조좌랑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효종 8) 공조정랑에 이어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효종을 만나 상소를 올리고는 임금의 덕과 정치의 폐단에 대해 말하고는 사임을 청하였다. 이에 사복시 주부로 옮겼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1659년(효종 10) 장령이 되어 임금의 덕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또한 당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이 주도하는 북벌정책에 신중할 것을 효종에게 간하는 옥궤명(玉廓銘)을 지어 바쳤다. 같은해 효종이 죽자, 상례를 논하는 상소를 올리고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경연(經筵)에 출입하였고, 다시 장령이 되어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 : 인조의 계비)의 복상기간이 잘못되었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소하여 정계에 큰 파문을 던졌는데, 이를 기해복제라 한다. 이 때문에 정계가 소란스러워지자, 현종은 그를 삼척부사로 임명하였다. 여기서 그는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쓰고 『척주지(陟州誌)』를 편찬하는 한편, 『정체전중설(正體傳重說)』을 지었다. 그후 숙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주장에 받아들여지자,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의 집권과 더불어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렸다.
1675년(숙종 1) 이조참판·비국당상(備局堂上)·귀후서 제조(歸厚署提調)를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되고, 의정부 우참찬 겸 성균관 제조로 특진되었다. 이어 이조참판을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유일하게 삼공(三公)에 오른 인물이 되었다. 이해 덕원(德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을 두고 영의정 허적(許積)의 의견에 맞서 가혹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남인은 송시열의 처벌에 온건론을 주장한 탁남(濁南)과 강경론을 주장한 청남(淸南)으로 나뉘어졌고 허목을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그는 지덕사(至德祠)의 창건을 건의하고, 체부(體府)·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지패법(紙牌法)·축성(築城) 등을 반대했다. 사임을 요청해도 번번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특명으로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이 되었는데 음사(蔭仕)로서는 특별한 예였다. 1677년(숙종 3년) 북벌론과 호포법(戶布法)을 주장하는 윤휴(尹頊)에 맞서 그 폐단을 논하고 반대하였다.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는 그림·글씨·문장에 모두 잘했는데,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의 대표적인 글씨로는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시흥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이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저서로는 『동사(東事)』·『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경설(經說)』·『경례유찬』·『미수기언(眉馬記言)』이 있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 『東國輿地志』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