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자료

모두에게 사랑받는 하남문화원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남의설화

법화골 3백 병사의 한(恨)

하남문화원 │ 2014-06-24

HIT

3128
법화골 3백 병사의 한(恨) 법화골에서 있었던 전투 이야기이다. 어느 시대 어느 전쟁이든지 승패는 군의 사기와 통찰력있는 지휘관의 용병술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화골에서의 패배도 한 지휘관의 실책으로 빚어진 결과였다. 1637년(인조 15) 1월 28일 남한산성에서 청군의 포위 속에서 30여 일간을 버틴 조선군은 성내의 군량과 소금, 심지어 마초(馬草)까지 동이나 사기를 잃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화의를 할 것인가, 전쟁을 계속 할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날 남한산성을 방어하던 영의정 김류(金濫)는 술사(術士)에게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좋은 지에 대해 물었다. 술사는 “오늘은 화(和)·전(戰)이 모두 길하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김류는 화의를 진행하면서 한편으로 싸우자고 했다. 그러나 나만갑(羅萬甲)은 “싸우겠다면 싸우고 화의하겠다면 화해할 것이지, 하루 동안에 어떻게 화와 전을 하겠는가. 이것은 마치 노래와 울음을 동시에 터뜨리라는 것과 같지 않은가”하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하였다. 이날 날씨가 조금 풀려, 사람들이 겨우 기를 펼 수 있을 정도였다. 김류는 성문을 지키는 장수를 불러 “북성 아래 적진은 매우 어설프니 각각 정병을 내어 이를 무찌르도록 하라”고 했다. 그러자 장수들은 모두 그 계책이 잘못된 것이라고 역설하며 김류의 말을 듣지 않았다. 김류는 고집을 부리고 직접 장병을 거느리고 나가 군기를 지휘하며 싸울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총수(銃手) 3백여 명이 북문을 나서 산기슭을 따라 내려가니 성 아래 골짜기는 어둑어둑한데 청나라 군사가 곳곳에 기병을 감추고 있다가, 다섯 군데에서 나와 모두 백여기(百餘騎)가 고골쪽으로 4∼5백보 지점까지 거짓으로 패해 달아나면서 진을 치고 조선군을 유인하였다. 김류가 성 위에서 기를 휘두르며 병사들에게 나아가기를 재촉하였다. 그러나 조선군 병사들은 모두 산에서 내려가지 않으려 했다. 이에 김류는 비장 유호(柳瑚)에게 나아가지 않는 자를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유호가 몇몇의 병사를 죽이고 나니, 병사들은 대열도 없이 겁을 먹은 채 산 아래로 내려가 버려 둔 우마를 빼앗았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우리 군병은 모조리 적이 쳐놓은 소나무 방책을 나갔기에 거느리는 장수도 없어 대오는 엉클어져 진도 이루지 못했다. 모두가 저 나름대로 적과 백병전을 벌리게 되었다. 김류는 화약과 탄환을 아껴서 쏘는 대로 대어주게 했기 때문에 한 방을 쏠 때마다 탄약 달라는 소리가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그때 적은 말고삐를 제치고 되돌아 돌입하니 말은 빠르기가 나는 것 같았다. 또한 사면에서는 복병이 나타나 우리 병사들을 들이치니 아군은 총 한방, 화살 하나 쏘아보지도 못한 채 순식간에 섬멸되고 단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별장 신성립(申誠立)·지학해(池學海)·이원길(李元吉)이 모두 죽었으며 청나라의 군사는 겨우 두 명만 죽었다. 소나무 방책을 불사르면 집결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겠다고 판단한 김류가 소나무 방책을 불사르게 한 결과 오히려 적이 우리에게 진격하는데 장애물을 제거한 꼴이고, 산세는 급경사로 갑자기 되돌아오기 어려운 데다가 산 위에서 후퇴를 알리는 기를 흔들었으나 성이 가려 보이지 않아 무참히 전멸하기에 이르렀다. 유호는 퇴군시키지 못한 죄로 참수되니 사람들은 모두 원통해 했다. 김류는 스스로 싸웠다가 스스로 패하여 어디에다 죄를 돌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북성장(北城將) 원두표가 구하지 않았다고 핑계를 대며 극형에 처하려 했다. 이때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이 “수장이 저질러 놓고 부장에게 죄를 들리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하여, 하는 수 없이 김류는 왕의 처소에 나가 엎드려 패전의 죄를 청하고 원두표의 중군(中軍)을 매질하여 거의 죽게 만들었다. 이런 뒤 그는 사기가 떨어져 다시는 나아가 싸울 뜻이 없게 되었고 끝내는 화의를 마음먹게 되어 인조가 청 태종 앞에 나가 항복의 수모를 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