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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징(구징)의 무덤에 얽힌 사연

하남문화원 │ 2014-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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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징(구징)의 무덤에 얽힌 사연 하남시 감북동에는 능내(陵內)라는 곳이 있다. 옛날 백제시대의 왕릉이 있었다고 전해져 이렇게 불려지고 있다. 지금은 거의 그 형적을 알아볼 수 없으나 그 옆에 있는 중종대 공신 구징(具徵)의 큰 무덤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중종이 어느날 백관을 거느리고 어전회의를 열었다. “영의정, 내자시 직장(內資寺直長)으로 있던 구징(具徵)은 어찌해서 보이지를 않소?” “황송하오나 입궐을 안했는 줄 아뢰오.” “과인을 용상에 오르게 한 일등공신인데 어이해서 조정에 나오지를 않는단 말이오. 지체없이 전갈하여 어전에 들라 하시오.” 임금의 명을 받은 영의정 성희안(成希顔) 대감은 가슴이 답답했다. 반정이 성공해서 한 달이 가까웠으나, 구징이 종적을 감추고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연산군 시절 대궐 안의 살림살이를 도맡고 있는 자리에 있었으므로 임금과는 늘 긴밀한 접촉을 하고 있던 구징은 연산군의 비행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간했다. 그러나 연산군의 음행과 학정은 날로 그 도를 더해 할 수 없이 반정 중신들과 밀모하여 연산군을 폐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중종을 추대하는데 앞장을 섰으므로 중종으로서는 일등공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임금이 공신호(功臣號)를 주고 큰 벼슬을 내렸으나, 그의 행방이 묘연한 것이다. 어전을 물러나온 성희안은 팔도의 수령방백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고을마다 샅샅이 뒤져서라도 구징을 찾으라는 명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속리산 법주사에 은거하고 있던 구징을 찾아내어 가까스로 왕 앞에 데려왔다. 구징을 맞이한 중종은 매우 반가워했다. “정말 반가운 일이오. 과인이 용상에 오른 뒤에 이렇게 기쁜 날은 처음인 것 같소. 그래 그 동안 별일 없으셨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상감마마.” “경은 그 동안 무얼 하시었소? 과인이 아무리 부덕한 임금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리 섭섭하게 하시오.” “황송한 말씀 무어라 아뢰올 길 없사오나, 미천한 소신은 향리에서 조용히 여생을 마치려 하였사옵니다.” “아니 될 말이오. 경은 과인에게 가장 보배로운 신하이오. 부디 과인의 곁에 있어주기 바라오.” “황공하옵니다. 상감마마. 하오나 소신은 선대의 상감을 모시던 신하이옵니다. 소신이 비록 이 나라의 사직과 백성을 위해서 반정을 일으키는데 가담하였사오나 어찌 두 임금을 섬기겠습니까? 깊이 통촉하옵소서.” “허어, 경은 과연 백이·숙제(伯夷叔齊)와 같은 인물이오.” 중종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벼슬을 사양한 구징은 낙향을 하고 말았다. 고향에 돌아온 구징은 촌로(村老)들과 시조를 읊으면서 술을 마시고 옛 선인들의 책을 읽으며 한가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중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에 화를 입게 된 구수복(具壽福)이 남몰래 피신하여 찾아온 것이다. 구수복은 구징과는 먼 친척이요, 또 조정에 있을 때에는 남달리 친숙하게 지내던 사이였으므로 박절하게 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나라에서 찾고 있는 중대 범인을 집에 숨겨 주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라 구징은 한동안 번민했다. 이윽고 구수복에게 큰 죄가 없음을 알게 된 구징은 그를 자기 집에 숨겨 주었다. 얼마 동안 아무도 모르게 지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소문이 밖으로 새어나가 어느새 조정에서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형조판서는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대역무도한 죄인 구수복이 구징의 집에 숨어있다 하오니 금부도사를 보내어 두 죄인을 잡아 올리도록 명을 내리시옵소서.” “어허, 그게 무슨 말이오? 구징이라 하면 과인이 가장 아끼는 구신(舊臣)인데, 어찌 그를 잡아오겠소. 죄인 구수복이 스스로 나와서 죄상을 밝히도록 이르라.” 이는 구징을 아끼는 임금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선전관을 구징의 집으로 보내어 구수복을 자수시키려 했다. 이 소문을 들은 구수복이 아무도 모르게 구징의 집을 빠져나가 또다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구징의 죄를 문책하지 않았다. 구징이 나이 칠십이 넘어 돌아가니 생전의 공로를 표창하기 위해 특별히 예장하였다.